정보
- ISBN : 9788972773696
- 출판사 : 리드리드출판
- 출판일 : 20230105
- 저자 : 황유나
요약
★★★★★서정적 문장에 담아낸 다정한 치유의 이야기“내 우울은 반타 블랙, 찐득한 바셀린처럼 나를 사랑해줘”★★★★★“그렇게 된다면 내 인생도 축제가 될지 모를 일이다!” 저자는 카드회사, 증권사, 코스매틱회사를 다니며 때로는 2년짜리 비정규직으로 잘리는 아픔을 겪기도 하고, 비정한 팀장으로 인해 밥벌이의 고달픔을 느끼며, 팀장이 된 후 중간관리자의 고충을 겪기도 한다. 옆집 이웃의 자살을 목격한 후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찰해보기도 하고, 섬세함을 요구하는 마케팅 업무를 하면서 잦은 실수를 저지르는 탓에 자신이 성인 ADHD가 아닌지 의심하기도 하며, 미래가 불안해 점집을 찾아다니기도 하는 등 누구나 한 번쯤 현대를 살아가며 겪어봤을 법한 고민과 사건을 솔직하고 서정적인 문장으로 풀어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왜 나에게라는 질문을 던졌지만 이제는 안다. 인생은 하나의 커다란 퍼즐이라는 것을. 그래서 파편화된 조각도 내 삶이고 찢긴 조각도 나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됐다. 저자는 남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좀 더 완벽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현대인들에게 말한다. “손에 움켜쥔 조각 중 어느 하나 하찮은 것이 없다. 빛나든 그렇지 않든 이제는 상관없다. 다만, 조각 하나하나마다 부여해 온 의미라는 비장한 척도는 지워야겠다. 사는 게 한결 가벼워지도록. 그렇게 된다면 우리 인생도 축제가 될지 모를 일이다.” “사실 나는 둥근 척하는 모난 돌이야”상처받지 않은 직장인은 없다!정규직이란 도대체 뭘까?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일을 하는데도 왜 월급 명세서에 적힌 숫자는 이리도 차이가 나는 걸까? 지금 얼마나 많은 청춘이 정규직이라는 말을 가슴에 품고 자신을 달래가며 애를 쓰고 있을까? 저자는 정규직을 시켜준다는 말에 2년간 열심히 을로서 살았지만, 결국 회사에서 잘리는 날을 맞은 그때의 심경을 담담히 적어 내려간다. 2년 계약이 만료되던 날, 회사에서 잘렸다. 팀장의 변명 아닌 변명에 따르면, 한 임원이 나를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타의에 의한 실직 상태라니. 백만 원 대의 실업 급여로 생계를 이어 가야 한다니. 막막했다. 갑과 을의 병정놀이 중에서저자의 간결한 묘사는 그래서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우리 중 그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아니 이미 겪었던 아픔이기 때문이다. 이미 〈미생〉이나 〈송곳〉이라는 웹툰과 드라마에서는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이들의 고통을 가슴 먹먹하게 그려내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의 글이 마음에 더 와닿는 것은 1인칭 시점으로 그 감정의 굴곡과 억울함을 내가 겪듯이 세세하게 그려내기 때문이다.좀 서운했지만 나는 내색 없이 묵묵히 최선을 다했다. 평소 팀장이 내 새끼들은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겠다며 장담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유령처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저변의 불안을 M에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M이 단순한 선의로서 내 마음을 팀장에게 전달한 모양이었다. 다음 날 팀장이 빈 회의실로 나를 불렀다. 내 두려움을 가라앉혀 주기 위함이었다. 팀장은 걱정 안 해도 된다고 장담했다.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니 정규직 전환에서 누락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재차 확인해주었다. 이어 농담조로 계약서에 서명할 준비나 하고 있으라며 웃었다.그로부터 3달여쯤 지났을까. 팀장은 회의실이 아닌 커피숍으로 나를 불렀다.“미안하게 됐다.”갑과 을의 병정놀이 중에서하지만 저자는 슬픔에 휩싸여 자책만 하는 패배자로 남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현실에서 가능하지도 않은 엄청난 복수의 활극을 벌이지도 않는다. 너나 내가 한 번쯤은 상상해 봤을 방법으로 억울함을 토로하다 끝내 이 상황이 갑과 을의 싸움이 아닌 병과 정의 싸움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른다.저자의 글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현실에서 받은 내 상처가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 힘든 사회생활 속에서 차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아픔과 슬픔, 고민이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저자의 이야기 속에서 공감받아 속이 후련해지기도 한다.
● “그 아픔과 상처에 보내는 공감과 위로!”
비정규직의 비애에서 삶의 의미까지 누구든 한 번쯤 겪을 법한 19가지 에피소드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다. 내 경계를 지키지 못한 채 무수한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은 말 못 할 아픔으로 하루하루가 힘겹다. 어디에 꺼내놓기도 멋쩍고,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틀어박혀 아파하기에도 어색한 내 마음속 통증을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금융부터 패션, 코스메틱까지 다양한 분야의 회사에서 겪은 내밀한 이야기를 에세이로 풀어냈다. 자신의 이야기일 수도, 주변 누군가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아니 현대인이면 누구나 겪을 법한 사건들을 소재로 우리에게 공감과 위로를 건넨다. 그녀만의 여린 감수성이 밴 서정적인 글은 눈물 글썽거리게 하다가도 다시 미소를 짓게 한다. 마치 내 마음을 들여다보듯이 빠져서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쯤이면 내 인생도 축제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좋은 친구로서, 따뜻한 선배로서, 아픔도 함께 품어주는 지인으로서 곁에 남아 있고 싶다. 좋은 점을 일깨워주는 것, 토닥이며 문득 안부를 묻는 것, 그리고 끄덕이며 공감해주는 것,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사소한 구원이다. 나와 그들을 위한. 수줍음은 자기애의 결정체이다. 나는 내성적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극도로 예민하게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자연히 삶의 무게 중심은 나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가 있었다. 상대에게 내 우위를 허락하며 나 스스로 자세를 낮췄다. 그들이 반사하는 내 모습을 나의 자아상으로 만들었다. 그래. 꼭 스포트라이트만 받아야 무대에 오르는 건 아니다. 만약 이 세계가 드라마라면 조연과 악역도 있고, 스치는 행인도 있다. 그들도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게 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엑스트라면 또 어떤가. 그건 그것대로 장단점이 있지 않을까. 내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 손에서 펜을 놓은 지 오래다. 때때로 글감이 떠올랐지만 단어에 자신이 없었다. 단어와 단어의 조합이 어렵게 느껴졌다. 망설임은 끝없이 이어져 하루가 넘어가고 이틀을 지나 십여 일이 된 듯했다. 그러다 문득, 말이 되지 않는 어색하고 난해한 글이 된다고 해도 마음이 불러주는 대로 써보기로 했다. 하루 한 문장이든 열 문장이든 꾸준히 써보자고. 왜 하필 나였을까? 이 질문의 답은 오리무중이다. 답이 중요하지도 않다. 어떤 일은 그냥 일어난다. 살다 보면 슬프고 괴로운 일들이 예기치 않게 벌어진다. 이를 다 잊게 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는다.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점점 더 아파 오는 상처가 있다. 물론 세월에 침식되어 희미해지는 상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어떤 상처건 받아들이는 법을 천천히 배워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뛰어남이나 열등함도 모른 채 유일함을 추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프리즘 중 내부의 선과 면의 구성이 온전하게 일치하는 게 단 한 쌍도 없다면 어떨까. 하나의 빛줄기를 서로 다른 모습으로 펼쳐내는 모습은 정말 경이로울 것이다. 제각각 뿜어내는 찬연한 빛의 어우러짐을 볼 수만 있다면. 단어 미생은 바둑 용어로 아직 살아 있지 않은 상태이자 완전히 살아날 여지를 남겨둔 상태를 뜻한다. 당시의 나는 미생이었다. 신념을 앵무새처럼 따라 읊었지만 그 신념을 충분히 검토하고 비판, 수용할 능력을 갖추었던 미생이다. 외할머니는 겨우 바셀린을 발라줄 정도의 마음만 열어주었다. 바셀린 한 통은 오롯이 내 몸뚱이에 발라졌다. 아낌없이. 바셀린은 여린 살갗의 만능 방어막이 되어주었다. 만취한 외삼촌이 소란을 피우는 와중에 주먹이나 발길이 내게 닿지 않은 것은 외할머니가 온몸으로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애정도 있다. 어쩌다 우연히 쓰임새를 갖게 되어 두루 쓰이며 어느 정도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들이다. 투명해서 보이지 않지만, 찐득하기는 또 어떤 연고보다 찐득한 바셀린처럼 말이다. 둘 중 하나 또는 여러 개 중 하나를 선택했을 때 그에 따르는 책임을 생각해본다. 그 무게와 긴장은 얼마나 큰지, 후회는 얼마나 하게 될지, 이 상황 저 상황 이해득실을 따져봐도 우열을 나누지 못할 때가 있다. 결정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또는 나 자신이 못 미더울 때 점집을 찾는다. 최첨단 시대를 살지만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의미 없어지는 순간이 있으니까. 하늘이 찌뿌드드한 날, 운 없는 우산 하나를 들고 나설 때면 이 우산과의 인연도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마음을 준비한다. 분실이 잦은 탓에 내 우산이라는 이 소유격 관계가 무색해진다. 르네 마그리트의 뭉게구름 무늬가 화사한 하늘색 우산을 선망해왔지만 오래 쓸 자신이 없으니 언감생심이다. 가방에 넣을 수 없는 장우산을 손에 꼭 붙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존경스럽기만 하다. 그는 왠지 일 처리도 흐트러짐 없이 야무질 것 같다. 나는 첫째임이 분명할 것이라거나 왠지 막내일 것 같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둘째일 것 같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저출산의 영향으로 낀 자녀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일까. 혹은 나의 포용력과 융통성이 아직 모자란 탓일까. 어찌 되었건 중간 아이들이 보편적으로 가진다는 장점을 가지고 싶은 나는 둘째 같다라는 말을 듣고 싶다. 서핑을 즐기는 화려한 무리 앞에서는 네 발로 물장구치는 그 우스꽝스러운 몸짓마저 치장하게 된다. 몰라도 아는 척하고 늘 겪어온 일인 척하며 사실은 서툴게 천천히 배워가는 중이다. 이제 막 디지털 마케팅에 입문했을 뿐인데 수년 내 AI가 나의 자리를 대체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적지 않은 나이이지만 앞으로 수십 년을 더 살아가야 한다. 이제 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걸까? 앞으로 10년 후, 나는 무얼 하며 살아야 할까? 어쩌면 우리의 기억도 일부 그런 모양이지 않을까 싶다. 좋은 기억은 반짝이는 별로 남아 추억이 되지만 평점 이하의 그저 그런 기억은 빠른 속도로 뇌리에서 지워지는 것인지 모른다. 내가 살아낸 지난 시절의 아픔과 권태가 희미해지다 끝내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렸기에 지금 나의 우주가 이토록 아름다운 건 아닐까. 빛의 속도를 가늠해본다면 그 별조차 실체를 잃고 박제된 과거이니까. 팀장의 위안은 한줄기 질기고 튼튼한 동아줄이었다. 그는 너의 불안을 내가 안다라는 위로와 언질을 떡밥처럼 던져대곤 했다. 그 떡밥 속에 낚싯바늘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입천장이 뚫리고 코가 꿰이더라도 감지덕지했다. 내 불안을 그의 호언이 잠재우고 내 걱정을 그의 장담이 불식시켰건만, 썩은 동아줄을 잡은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툭 떨어져야 했다. 몸이 늙어지는 것보다 마음이 늙어지는 게 더 슬프다. 만물이 그렇게나 선명하고 밝았는데 이젠 모두 희멀건한 안개에 싸여 있는 것 같다. 한때는 어떤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도 없이 발견해내고 배워 나가는 과정에만 오롯이 몰입했었다. 성공하려는 욕심 없이 그저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르는 것 자체가 희열이었다. 제법 세상을 알게 되었다고 오만해진 순간, 총천연색으로 찬란하던 세계는 반짝임을 잃었다.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가늠하기 위해 가끔 명상을 한다. 그 순간의 내 몸짓과 언어가 일으킨 파장이 어느 날 어느 곳에 닿아 어느 사람의 빛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완성형인 삶이다. 무용수의 동작 하나가 이미 아름답다면 공연의 결말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완벽하게 완성되는 삶은 없다. 아쉬움이 남아야 사랑해줄 부분이 있지 않은가. 꿈과 환상으로 가득 찬 동화가 주입하는 당위성을 경계해야 한다. 세상에 당연한 인과관계는 없다. 우리의 생각보다 자연은 비인격적이며 무작위하고 무정하다. 무람없이 일어나는 현상에 일일이 부여하는 개인적 의미가 비극을 초래한다. 그랬더라면? 혹은 그러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누구나 그저 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할 뿐이다.
#내일, 내가 다시 좋아지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