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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정보

  • ISBN : 9788987608181
  • 출판사 : 이산
  • 출판일 : 20010126
  • 저자 : 미야자키 이치사다

요약

● 완벽한 독재정치를 통해 청조의 내실을 다졌던 청의 5대 황제 옹정제의 전기.

사실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와 아들 건륭제에 비해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13년이란 재위기간도 두 왕(각각 61년간 통치했다)에 비해 무척이나 짧았고, 청조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던 강희제나 화려한 대외원정을 행했던 건륭제에 비해 이렇다 할 자취를 남기지 못했기 때문. 옹정제가 조금이나마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점이 있다면 음모로 가득 찬 황위계승 싸움의 마지막 승자로서 야사 등에서 묘사된 냉혹하고 권력 지향적인 인물이라는 정도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러한 기존의 평가를 거부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옹정시대 13년이 있었기에 청왕조는 건륭시대에 최대의 번영을 맞게 되었고, 옹정제 사후 한 세기 반 이상을 지탱할 수 있었다는 것. 이러한 관점에서 지은이는 (옹정제와 232명의 관료가 주고받은 서간문을 모은 책)를 바탕으로, 옹정제의 뛰어난 정치력과 개혁정책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 책에서 보여지는 옹정제의 모습은 그야말로 성실과 근면의 화신이라고 할 만하다. 옹정제는 송대(宋代) 이후 깊이 뿌리내린 학연·지연·혈연에 따라 단결하는 붕당을 깨뜨리고 과감하게 새로운 인재들을 발탁했다. 그리고 강희제가 만든 주접제도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곳곳에 자신의 밀정을 파견하고 관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게 했으며, 민심의 동향을 살폈다.

또한 지방관들에게도 주접을 쓰게 하여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일일이 점검하고 그 자신도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나 밤 1012시까지 쉴새없이 국사를 처리하는 등, 완벽한 내치(內治)를 시행하고자 했다.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 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는 옹정제의 말은 단순한 호언장담이 아니었다.

그러나 옹정제식의 철저한 독재 정치는 옹정제가 아니면 할 수 없었기에, 그의 사후 청조의 정치는 다시 강희제식의 관대한 정치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지은이는 이러한 옹정제의 개혁과 그 한계를 균형잡힌 시각으로 되짚어 나가며 세계에서 가장 양심적인 독재 군주 옹정제의 진면목을 새롭게 발견해낸다.


#옹정제

리뷰

a*** 중국통사를 썼던 미야자키 이치사가가 쓴 책이다. 옹정제를 통해 바라본 독재제도의 특징을 잘 묘사해주었다. 2021-10-02 21:50:40.913
w*** 아주 좋습니다 꼭 읽으시요 2021-08-03 21:59:11.443
n*** 기대됩니다. ^^ 2019-03-27 16:45:30.51
a*** 미야자키 이치사다를 알게 되어 읽게된 책입니다. 13년간 통치한 옹정제이지만 청나라가 276년간 지속하는데 지대한 공로를 한 군주라고 평가합니다. 2017-10-29 19:50:15.573
m*** nbsp 이 책은 미야자치 이치사다(宮崎 市定)가 1999년에 지은 雍正帝-中國の獨裁君主(옹정제-중국의 독재군주)라는 책을 연세대 사학과 차혜원 교수께서 2001년에 번역한 책이며 2013년 7월 25일에 9쇄 발행판입니다. 미야자치 이치사다의 책은 중국 통사(中國 通史), 수양제(隋煬帝)에 이어 세 번째 책입니다. 동양사의 대가 라고 일컬어지는 미야자치 이치사다의 책은 믿고 봅니다.

강희제(康熙帝, 재위16611722), 옹정제(雍正帝, 재위17221735), 건륭제(乾隆帝, 재위 17351795)의 134년간은 청(淸)나라의 전성기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중 건륭제는 공식 재위기간이 위에 보듯이 60년 이지만 아들 가경제(嘉慶帝)에게 양위하고 4년간 섭정을 하여 실질적으로는 64년을 통치하여 중국 역사에서 최장 통치 기록을 세웠으며 그의 치세하에 청나라는 칭기즈 칸 이래 최대 영토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옹정제(雍正帝)의 치세는 13년으로 아버지 강희제(61년)와 아들 건륭제(공식 60년, 섭정 포함 64년) 보다 상당히 짧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세상의 관심이 작은 편입니다.

청나라는 3대 순치제(順治帝, 재위16431661)가 명(明)나라 왕조 멸망의 뒤를 이어 1644년에 베이징에 입성하여 중국 전체를 통치합니다. 만약 근세 중국에서 대표적인 독재(전제)군주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자는 서슴지 않고 청나라의 옹정제 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청나라가 베이징에 입성한 이후부터 헤아리면 3대째가 되는데 왕조가 흥할지 쇠할지는 대체로 3대째 정도에 결판나므로 옹정제는 청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갈림길에 서있다고 평가합니다.

강희제의 4황자로 태어난 옹정제의 즉위는 1722년으로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1682년) 보다는 40년 늦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ße, 1740년) 보다는 18년 빠릅니다. 옹정제는 이들 군주와 충분히 어깨를 견줄 만한 치적을 이룩하였다고 저자는 언급합니다.

옹정제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너무나도 지는 걸 싫어해서 승부를 건 놀이가 불가능한 천품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이란 가장 비경제적인 것으로 그 때문에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어야 할 지 모른다는 깊은 배려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옹정제의 치세에는 혁혁한 무훈(武勳)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직접 군대를 지휘한 적도 없었고, 아마 있었다 해도 서툴렀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독재(전제)군주라고 하면 곧 전쟁을 연상하지만 옹정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적인, 그러면서도 철저한 독재군주였습니다. 그러나 무공을 세우지 않은 황제의 업적은 역사에서 가장 먼저 잊혀져 가는 법이라고 언급하며 작자는 옹정제를 책을 통해서 자세히 소개합니다. nbsp 2017-10-29 19:47:12.98
u*** 옹정제의 성실함이 잘 묻어나는 책인것 같이다. 개인적으로 강자(부유층)에게 엄격하고 약자(서민)에게 관대한 지도자를 매우 좋아하다 보니 더더욱 개성있는 황제로 와닿았었다. 더불어 작가의 간결한 문장은 어려운 내용을 보다 쉽게 풀이해주고 있어서 생각보다 술술 읽었다. 옹정제에 관해 훑어보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추천하는 책이다. 2017-07-20 17:16:07.34
a*** 중국통사를 쓴 미야자키 이치사다를 믿고 고른 책. 2017-04-29 19:12:56.323
b*** 일반 대중독자들에게 대다수 중국이나 중국사를 떠올리라고 한다면 대다수는 삼국지나 공자, 노자, 한비자 등의 제자백가 혹은 진시황의 춘추전국시대 통일 등 상당히 단편적일 것이다. 본인도 그러했다. 중국사를 굳이 뭐하러 알 필요가 있나. 그저 우리나라 역사가 왜곡되는 현실에서 중국의 외교굴기가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급성장과 더불어 인문학의 부흥이 자연스럽게 중국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다. 중국의 방대한 역사를 다 알기는 쉽지 않다. 다만 단편적이라도 이어붙인다면 나름 의미 있을 것이라 여겼다. 저자 이치사다는 일본에서 중국사 전문가로 방대한 내공을 가진 교수로 중국에서도 인정 받은 학자이다. 그의 책은 국내에서 간간히 번역되고 있는데 완간번역되길 바라본다. 옹정제는 아버지와 형의 재위기간의 훨씬 못미치는 13년 동안 완벽한 독재를 통해 중국 역사의 한 귀틀을 마련했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거대한 중국 영토와 민족, 관리들을 한 사람이 다스릴 수 있을까. 옹정제는 해냈다. 그것도 완벽하게. 그래서인지 독재의 예로 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중국의 일당 독재체체에서는 이 옹정제는 누구보다 고마운 신화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금물이다. 현재는 그때와는 너무나 다른 사회다. 게다가 옹정제는 개혁을 단행하여 선의의 정치를 했다. 이는 현대정치에서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nbsp 이치사다는 재밌는 이야기 한 편을 얽혀내듯 술술 역사를 풀어낸다. 그래서 줄어드는 페이지 수가 아쉬웠다. 2017-01-23 14:03:31.473
h*** 이치사다의 중국사는 말이 필요없다. 필독. 2017-01-19 15:14:12.48
k*** 강희, 건륭제에 비해 재위 기간이 짧아서 상대적으로 조명을 덜받는 황제이지만, 성실하다는 평가가 여러곳에 보이는 만큼 많은 일을 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알게 되었습니다. 짧지만 필요한 모든 내용이 담긴 좋은 책이었어요. 2016-11-15 18:52:44.653
c*** 편지, 정치를 만나다. - 옹정제와 정조의 가상대담 nbsp 옹정제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이산, 2001 nbsp 옹정제는 강희제의 넷째아들로 태어나 45세 때 강희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이후 1735년 사망할 때까지 13년 동안 중국을 다스렸다. 아버지 강희제와 아들 건륭제의 재위기간이 각각 61년이었던 것에 비하면 한참 짧은 기간이지만, 옹정제는 그 어느 황제보다도 많은 일을 했으며 청조의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하여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일본 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옹정제의 전기이자 근세 중국의 관료제, 재정, 재판, 풍속을 이해하는 역사서인옹정제를 통해 중국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독재군주였던 옹정제를 박진감 넘치게 그려냈다. nbsp 그동안 청조의 기틀을 다진 강희시대나 청조의 전성기를 구가한 건륭시대는 높이 평가되었지만, 옹정시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과소평가 된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는 옹정시대 13년이 있었기에 청왕조는 건륭시대에 최대의 번영을 맞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미야자키는 무엇보다도 옹정제의 정치력을 높이 평가한다.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처럼 덕망 높은 유교 군주로 추앙 받지도 않고, 화려한 대외원정으로 전 아시아에 청조의 평화를 각인시켰던 건륭제처럼 화려한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만주족의 100배가 넘는 중국인과 방대한 중국 대륙을 가장 완벽한 자신만의 스타일로 통치했다. 옹정제의 정치는 한마디로 선의에 넘치는 악의의 정치였다. nbsp 대표적인 것이 강희제가 만든 주접제도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곳곳에 자신의 밀정을 파견하고 관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게 했으며, 민심의 동향을 살피는 방법이다. 아울러 지방관들에게도 주비유지라는 붉은 붓으로 쓴 친필서한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지방관들을 일일이 점검했다. 그는 요즘말로 하면 워커홀릭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새벽 4시 이전에 일어나 밤 10∼12시까지 쉴새없이 일했다. 강희제는 종종 사냥도 나가고 또 장기간 지방을 순행하기도 했지만, 옹정제는 재위 13년 동안 단 한번도 베이징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nbsp 저자가 갖고 있는 옹정제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과 호의가 곳곳에서 묻어난다. 살아있는 인간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생생한 묘사와 구체적인 사실이 엮어내는 긴박함은 이 책을 역사에 길이 남을 10대 전기의 하나로 높이 평가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옹정제를 읽다가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정조다. 비록 시대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옹정제(1678123161735)가 근세 중국의 대표적인 獨裁君主로 불리는 반면, 정조(1752123161800)는 조선 후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불러 온 改革君主 또는 好學君主로 알려져 있다. 서로 다른 부분이 많지만 어느 면에서는 흡사한 구석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둘이 지금 만나 가상으로 대담을 나눈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상상이 들었다. nbsp 옹정제 내가 보위에 오르는 과정이 얼마나 신산했는지 들어 아실테지요. 부왕인 강희제께서는 덕망 높은 유교 군주이면서 다른 면으로도 얼마나 부지런하셨던지 무려 일흔명에 달하는 자녀를 두었고, 그 중에서 황자 숫자만도 서른다섯이나 되었답니다. 처음에 이이아거 형님이 황태자로 책봉되었지만 황위계승을 둘러싼 암투로 인해 결국 청조에서 최초이자 마지막 황태자이며 두 번 황태자가 되었다가 두 번 폐위된 불행한 운명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지요. 우여곡절 끝에 사이거인 내가 왕위에 올랐지만 이런 일을 두 번 다시 자식들에게 되풀이시키고 싶지 않아 고안해 낸 것이 바로 미리 후계자를 정해 두되 행실이나 인물됨을 지켜보면서 얼마든지 바꿀수 있는 태자 밀건법(密建法)이라고 불리는 방식이지요. 내가 만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참 훌륭한 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 그나저나 내 들으니 작년 2월에 대왕이 중신이었던 심환지에게 보낸 친필 어찰 297건이 새로 발견되어 세간의 비상한 주목을 받더군요. 대왕과 정치적 입장이 상반되는 노론 벽파의 중추적 인물에게 私信이면서 密書를 보내는 일종의 막후정치, 그거 솔직히 내 통치술을 따라한 것 아니요? nbsp 정조 (하하) 네! 맞습니다. 맞고요. 사실 친부인 사도세자가 조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갖혀 죽음을 당한 사실로 인해서 입지가 매우 곤혹스럽고 위태로웠습니다. 내 가 구상한 정치운영 방식에 반대하는 세력을 견제하고 탕평정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심환지와 같은 노련한 정치력이 필요했지요. 느리게는 몇 달에 한 번, 빠르게는 하루에 4번이나 편지를 보내 민감한 정치현안을 막후에서 조정하고 정국을 처리해 나갔습니다. nbsp 옹정제 원래 100만도 되지 않는 만주인이 그 100배도 더 넘는 중국인 위에 서서 청조를 건설하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밀정정치를 쓸 수 밖에 없었지요.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주접(奏摺)이라는 형식의 문서로 직접 보고하게 하고, 주비유지라는 붉은 붓으로 쓴 친필서한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지방관들을 점검한 것이 대표적인 방법이라오. 어떤때는 나도 주비유지에 “바보는 고칠 수 없다는 말은 바로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금수라도 너보다는 낫다.” “양심을 뭉개 버리고 수치를 수치로 여기지 않는 소인배.” 등 원색적인 욕설과 온갖 비난을 퍼부었는데 대왕도 크게 다르지 않더이다. 참으로 호로자식 주둥아리를 놀리려고 한다 등과 같은 거친 표현이 어찰에 심심찮게 나오는걸 보면 말이오. nbsp 정조 대왕께서도 마흔다섯에 대임을 지고 천자의 자리에 오른후 13년 재위기간 동안 단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천자는 일일만기(一日萬機), 곧 하루에 1만 건의 사무를 처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왕이라는 자리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정말 눈이 핑핑 돌아갈 정도로 바쁜 자리지요. nbsp 옹정제 그렇지요. 보통 밤 열시나 열두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네시가 되기 전에 일어나 정무를 보는대도 늘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으니까요. 신하들을 보세요. 그들은 벼슬살이를 할 만하면 벼슬을 살고 그만둘 만하면 그만 두지 않습니까. 늙으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손들을 돌보면서 유유자적하게 보낼 수 있지요. 그러나 우리같은 군주들은 평생토록 부지런히 수고하고 쉴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보면 우리같은 3D업종도 없어요. 그런데 우리 후대에서도 그걸 서로 하겠다고 저 난리들이니 원. (쯧쯧) nbsp 정조 지금 사람들은 그걸 워커홀릭이라고 말합니다. 조기사망의 지름길이지요. 그러나 대왕은 57세, 나도 48세까지 살았으니 당시로서는 장수한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우리는 서로 공통점이 많은것 같습니다. 선대왕들의 긴 재위기간 끝에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쳐 보위에 오른 것이나 선호했던 통치술도 그렇고 말입니다. nbsp 옹정제 그러게 말입니다. 어쨌거나 군주로서의 내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 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지는 일은 하지 않으리.” -끝- (2010.5) 2010-05-08 16:03:11.443
p*** 내가nbsp알고nbsp있는nbsp중국의nbsp역사는nbsp얼만큼이며,nbsp우리가nbsp알고nbsp있는nbsp중국봉건독재체제의nbsp황제는nbsp가nbsp있는가.nbsp아마도nbsp대부분은nbsp우선nbsp진시황을nbsp답할nbsp것이며nbsp그nbsp외에nbsp또렷하게nbsp기억나는nbsp왕이라면nbsp영화에서nbsp본nbsp무력하고nbsp기구한nbsp운명의nbsp푸이라든가nbsp그리고nbsp징기스칸이nbsp중국역사에nbsp있었던지nbsp몽골역사에nbsp있었는지nbsp..하고nbsp갸웃갸웃하게nbsp될nbsp것이다.nbsp나nbsp역시,nbsp중국이라는nbsp곳에nbsp와서nbsp공부를nbsp하기로nbsp했으면서도nbsp부족한nbsp한국사보다도nbsp더nbsp적은nbsp중국의nbsp역사지식뿐이었다.nbsp처음에nbsp중국에nbsp대한nbsp관심은nbsp공산당을nbsp비롯한nbsp근대사에nbsp있었다.nbsp그러나nbsp근대사뿐만nbsp아니라nbsp모든nbsp역사는nbsp일종의nbsp순환을nbsp거듭하고nbsp있고nbsp또한nbsp역사속에nbsp중국인의nbsp문화와nbsp습관을nbsp알아야지만nbsp현대의nbsp중국도nbsp이해할nbsp수nbsp있는nbsp당연한nbsp논리때문에nbsp중국에nbsp관련된nbsp것이라면nbsp무엇이든nbsp가리지nbsp않고nbsp알아도nbsp별nbsp무리는nbsp없을nbsp것이라는nbsp생각이nbsp들었다.nbsp그래서nbsp[칸의nbsp제국]과nbsp[마테오리치nbsp기억의nbsp궁전]을nbsp읽고나서nbsp집어든nbsp책은nbsp미야자키nbsp이치사다라는nbsp일본nbsp역사학자의nbsp[옹정제]였다.nbsp이nbsp책은nbsp1951년도에nbsp출판되었던nbsp책으로nbsp지금과는nbsp상당히nbsp거리가nbsp있는nbsp과거의nbsp산물이라고nbsp할nbsp수nbsp있다.nbsp그러나nbsp옹정제라는nbsp숨어있는nbsp황제에nbsp대한nbsp연구가nbsp매우nbsp드물기nbsp때문에nbsp미야자키의nbsp이nbsp책은nbsp그nbsp중요도를nbsp무시할nbsp수nbsp없다nbsp한다.nbsp[옹정제]는nbsp그nbsp양이nbsp적어nbsp읽기nbsp편한nbsp글씨와nbsp넉넉한nbsp간격을nbsp둔nbsp디자인을nbsp이룬nbsp책이다.nbsp그nbsp내용이nbsp적어nbsp다른nbsp불만을nbsp가진nbsp사람들도nbsp있을nbsp수nbsp있겠지만.nbsp작가는nbsp내내nbsp이야기를nbsp하듯이nbsp자신의nbsp의견을nbsp시기적절하게nbsp적용하며nbsp이야기를nbsp풀어나간다.nbsp옛날nbsp구중궁궐에nbsp이런nbsp일이nbsp있었단다…라는nbsp식의nbsp이야기체로nbsp중국역사에nbsp별nbsp관심이nbsp없는nbsp사람이라nbsp하더라도nbsp접근하기nbsp쉬울만한nbsp필체이다.nbsp그러나nbsp단지nbsp이야기로만nbsp끝나는nbsp것이nbsp아니고nbsp옹정제를nbsp미야자키라는nbsp노()역사가가nbsp다시nbsp들추어nbsp낸nbsp이유가nbsp무엇이며nbsp이nbsp책이nbsp출판된nbsp1951년의nbsp중국정세를nbsp상상했을때nbsp이nbsp작가는nbsp옹정제를nbsp통해nbsp그nbsp당시의nbsp중국과nbsp그리고nbsp현재가nbsp되어버린nbsp미래의nbsp중국을nbsp한꺼번에nbsp통찰하려했음을nbsp알nbsp수nbsp있다.nbsp1951년,nbsp중국이nbsp공산당nbsp혁명을nbsp승리로nbsp이끌고nbsp마오쩌둥이nbsp중국의nbsp새로운nbsp황제로nbsp등장하였던nbsp시기다.nbsp미야자키의nbsp옹정제는nbsp책의nbsp마지막nbsp장을nbsp독재정치의nbsp한계라는nbsp제목으로nbsp마무리하였다.nbsp작가는nbsp아마도nbsp그nbsp당시의nbsp중국의nbsp모습을nbsp또nbsp다른nbsp하나의nbsp전제정치,nbsp황제독재정치로nbsp보고nbsp있었던nbsp것nbsp같다.nbsp상해에서nbsp길지nbsp않은nbsp시간을nbsp보낸nbsp나로서도nbsp중국은nbsp정신적nbsp실질적nbsp황제없이는nbsp존재하기nbsp힘든nbsp나라로nbsp보일때도nbsp있다.nbsp정치에nbsp관심이nbsp없어nbsp정부를nbsp믿고nbsp있고nbsp공산당이라는nbsp유일당만이nbsp존재하며nbsp정부를nbsp믿지nbsp않으면nbsp누구를nbsp믿느냐는nbsp푸단대nbsp사회학과nbsp졸업생의nbsp말을nbsp듣었던nbsp나는nbsp이들의nbsp정치의식이nbsp평균적으로nbsp어느nbsp수준에nbsp있는가…..라는nbsp생각을nbsp했었다.nbsp중국의nbsp자본주의는nbsp급속히nbsp발전할nbsp것이며nbsp이들nbsp천성의nbsp장사기질은nbsp개혁개방이후nbsp들어온nbsp자본주의로nbsp인해nbsp엄청난nbsp꽃을nbsp피울nbsp것이지만nbsp5천년이nbsp약간nbsp안되는nbsp오랜nbsp세월동안nbsp황제없이nbsp살지nbsp않았던nbsp국민들과nbsp현대화nbsp이후에도nbsp종신제나nbsp마찬가지인nbsp세명의nbsp주석을nbsp나랏님처럼nbsp모시고nbsp살던nbsp이nbsp사람들이nbsp민주주의를nbsp이루는nbsp것은nbsp거의nbsp불가능해nbsp보인다.nbsp50년이nbsp지난nbsp오늘에서도nbsp중국을nbsp보는nbsp눈이nbsp이럴nbsp것임을nbsp작가는nbsp미리nbsp예견했던nbsp것일지도nbsp모른다.nbsp역사란nbsp항상nbsp돌고nbsp돈다했다.nbsp그리고nbsp과거의nbsp일이nbsp결국은nbsp반복되기도nbsp한다했다.nbsp나는nbsp역사에nbsp대해nbsp아는nbsp것이nbsp거의nbsp없지만nbsp작가nbsp미야자키가nbsp역사가nbsp무엇인지nbsp알고nbsp1951년에nbsp300년nbsp청조역사에서nbsp불과nbsp13년동안nbsp권좌에nbsp앉아nbsp있던nbsp조용한nbsp황제nbsp옹정제를nbsp일부러nbsp끄집어nbsp낸nbsp것은..nbsp분명히nbsp뭐라nbsp말할nbsp수nbsp없는nbsp의미가nbsp있어보인다.nbsp작가는nbsp또한nbsp이런말을nbsp했다.nbsp전쟁에서nbsp큰nbsp공을nbsp세우거나nbsp영토를nbsp확장한nbsp왕만이nbsp이름있는nbsp전제군주로nbsp역사에nbsp남는nbsp것은nbsp무척nbsp슬픈일이라고.nbsp40이nbsp넘어nbsp천자의nbsp자리에nbsp올랐던nbsp옹정제.nbsp그의nbsp가리워진nbsp인생을nbsp들추어보며nbsp역사에nbsp대한nbsp감을nbsp느껴보는nbsp것…적잖이nbsp만족스런nbsp일이었다.2001.7.7nbsp 2008-10-06 13:27:05.85
o*** Ⅰ. 머리말 nbsp옹정제(雍正帝)는 청(淸) 왕조의 5대 군주로서 성명은 애신각라 윤진(愛新覺羅 胤縝)이고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헌제(憲帝)이다. 열정적으로 대외정복 사업을 수행했던 강희제의 넷째 아들로 황위 계승권에서 벗어나 있었던 그였지만 정말 뜻하지 않게 강희제의 뒤를 이어 청을 다스리게 된다. nbsp저자는 이 책에서 옹정제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양심적인 독재군주라고 칭하면서 그가 대단한 위임임을 역설하고자 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항상 청나라의 황금시대로 여겨지는 강희제부터 건륭제까지 이어지는 약 150여년간의 치세에 포함되어 설명되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강희제와 건륭제 사이에 즉위했던 군주였기에 그랬다기보다는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자체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당연히 이런 학풍 속에서 옹정제는 두 군주들 사이에서 빛을 발휘하지 못했고 그런 옹정제를 저자는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내어 본래의 빛을 되찾아주는 작업을 한 셈이었다. nbsp사실 평자 역시 옹정제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리포트를 낼 기회를 맞이해서 읽어보고 관련된 자료를 조금 찾아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저자가 옹정제를 두고 세계에서 제일 가는 독재군주이자 정치가였다고 호언장담한 것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게 되었다. 그만큼 옹정제에 대해서 평자가 아는 것이 전무했던 것도 그러한 이유 중의 하나겠지만 그보다는 옹정제에 대한 기존과 다른 시각에서 쓰여진 이 책이 옹정제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전해줌으로써 그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nbsp강희제와 건륭제를 정복형 군주에 비한다면 옹정제는 철저한 내정지향형, 즉 수성형(遂成形) 군주라고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강희제 시절에는 내부적으로 오삼계의 난이라고 하는 청 왕조의 생사를 결정지을 정도의 대규모 전란이 있었으며 건륭제 시절에는 준가르부로 대표되는 서부 지역을 평정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 작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전쟁 하나만으로는 그들을 정복형 군주라고 할 수는 없으니 두 군주 치세때에는 청 왕조가 군사력을 이용해 어려차례의 활발한 대외 정복이 이뤄졌던 때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옹정제 치세에는 이렇다 할 대규모 전란이 없었다. nbsp우리가 흔히 옹정제를 잊고 강희제와 건륭제만을 논하는 이유는 또 하나, 옹정제의 재위 기간이 다른 두 군주에 비해 지나치게 짧았던 점도 한몫 담당한다고 본다. 거기에다가 역사에 화려하게 기록될만한 대외 정복 기사가 지나치게 적은 것도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마지막이 강희제와 건륭제만을 논하고 마는 알 수 없는 고정관념일 것이다. nbsp얼핏 들으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흔히 시작과 끝을 중요시 여기는 풍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옹정제의 치세는 청 왕조 초기, 청 왕조가 기틀을 확실히 잡아가던 그 시기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었고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저자 역시 옹정제가 북경에 입성한 이후 3대째 황제가 된 인물로서 한 왕조의 흥망성쇠는 3대쯤에 결정난다고 보고 있으니 옹정제의 치세가 청 왕조에 있어서 일종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런 몇가지 생각들을 가진채 간단하게 서평을 남기고자 한다. Ⅱ. 책의 구성과 비평 nbsp이 책은 중국의 거의 모든 분야와 서아시아에 걸쳐 방대한 연구업적을 남기는 등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로 활약하던 저자의 연구 서적 중 하나이다. 저자는 특히「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로 불리는 13년간 옹정제가 지방 관아와 주고 받았던 비밀편지들을 주 사료로 채택하여 옹정제의 치세를 평가하고 있다.nbsp nbsp옹정제는 종래 중국의 어떤 제왕도 해내지 못하였던 훌륭한 정치를 행하고 일찍이 중국 역사가 경험하지 못하였던 공정한 사회를 건설해서 만민이 안심하고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한 군주였었다. 그것이야말로 하늘이 청조의 군주에게 특별히 내린 임무이며 그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청조와 만주인은 중국인한테는 물론이고 하늘의 칭찬을 받게 될 것이며 그 일가는 자손 만대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말이다. 이것이 옹정제의 확고한 신념이었고 거의 종교적인 신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황제는 이 신념을 당시의 만주인 특유의 성실함과 강한 인내심으로 실행에 옮겼는데 그 증거가 바로 앞서 언급한「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였던 셈이다. nbsp기존과는 다른 시각으로 이 책을 서술함으로써 비록 교양서적이지만 옹정제에 대해서 굉장히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평가한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희제로부터 건륭제까지의 치세가 왜 청 왕조 최고의 태평성대였는지 알기 위해서는 옹정제에 대해서 알아야만 하는데 그 과정에서 이 책이 제공하는 정보는 실도 대단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nbsp이 책의 부록을 제외한 본문의 목차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머리에 1장 고뇌하는 노황제 2장 개가 되고 돼지가 되라 3장 그리스도에 대한 맹세 4장 천명을 받들어 5장 총독 삼인방 6장 충의는 민족을 초월한다 7장 독재정치의 한계 nbspnbspnbspnbsp1. 남들과는 다른 타고난 처세술 nbsp개인적으로 처세술은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이 처세술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옹정제 역시 처세술에 있어서 훌륭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는 분명히 강희제의 4번째 황자, 사아거로서 황위 계승권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은지 오래였다. nbsp후술하겠지만 강희제가 황태자로 지목한 이아거의 말썽으로 인해 청 황실은 많은 내부 문제를 겪은 바 있다. 옹정제가 젊은 나이에 등극하지 못하고 한창때에 등극한 것만 봐도 애초에 강희제가 사아거인 그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이 아님을 잘 알 수가 있다. 이와 더불어 그 와중에 옹정제는 자신의 처신을 잘 했고 그런 다분히 의도적이었던 모습이 결코 우연히 다음 제위를 넘겨 받은 것이 아님을 드러내보였던 것이다. nbsp저자도 밝히고 있지만 옹정제는 사아거의 신분으로 태자인 이아거의 행동을 보면서 어느정도 제위에 대한 욕심이 생겨났던 것 같다. 물론 다른 황자들도 다 그랬겠지만 사아거는 유독 다른 야심찬 황자들과 달리 정치권과 결탁하지 않았다. 이 말은 곧 옹정제가 당시 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세력들과 모의해 다음 제위에 대한 욕심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이것은 대단히 효과적인 고도의 심리전인 동시에 최고의 처세술이라고 생각한다. nbsp저자는 이렇게까지는 평하지 않고 단지 옹정제가 사아거로서 학문에 정진하고 권력에 욕심이 없음을 밝혔고 그로 인해 강희제의 눈에 들어 황제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평자가 보기에는 분명 당시 옹정제는 제위를 넘볼 수 있는 계승권상에 있었으며 그럴만한 능력과 야욕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오히려 옹정제는 당시 붕당을 이루어 서로 권력을 다투는 정치판을 보고 일종의 회의감과 붕당의 부정함, 정치판의 양면성을 꿰뚫어보기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그로 인해 제위를 꿈꾸는 그로 하여금 더욱 학문에 정진해 더 영민한 군주가 되게끔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nbsp실제 그가 즉위하여 행한 일련의 독재정치의 수단, 즉 112책 분량에 달하는「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와 함께 군기처(軍機處)의 설치는 그러한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옹정제는 준가리아 토벌을 계기로 신속한 용병과 기밀보존을 목적으로 1729년 궁내에 임시로 군수방(軍需房)을 설치하였으며, 이를 1732년에 판리군기처(辦理軍機處)로 개칭하고 독립적인 상설관청으로 개설하였다. 처음에는 이 곳에서 군사상의 사무만을 보았으나, 점차 황제의 자문에 응하고 조칙을 작성하고 군사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중요사항까지 처리하여 중요한 국무 전반에 걸쳐 심의 결정하는 국가 최고기관이 되었던 것이 바로 군기처였다. nbsp 하늘이 모르는 일도 황제는 안다라는 말이 떠돌았을 정도로 공포 정치가 이뤄졌고 옹정제가 죽자 모든 백성이 환호했다는 것만 봐도 그의 독재정치는 상당히 엄격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일련의 옹정제의 정치행보는 황제가 되자 그제서야 생각해낸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늘로부터 절대권력을 이임받아 만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내겠다는 야심은 그가 이미 제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의 가슴 속에 항상 남아있었다고 봐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그만의 처세술이 돋보이는 것이 아닐까 한다. nbspnbspnbspnbsp2. 꼼꼼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세심한 성격 nbsp저자는 옹정제가 성격이 내성적이고 유약하며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하고 있다. 솔직히 청 왕조같은 대제국의 대외정책은 그 지도자의 성격이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했을 때 앞서 봤듯이 옹정제는 강건하고 진취적인 기상보다는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고 확실하며 꼼꼼한 성격이었던 것 같다. nbsp그의 그런 성격은 앞으로 서술할 그의 정치 스타일과 그의 치세 중에 있었던 몇가지 일화를 보면 잘 알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저자가 서술하기를 만주족은 대륙을 지배하면서 한화(漢化)되어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었다고 하면서 가족 제도나 아주 근본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그러지 못 했다고 한다. nbsp그 중 하나가 독재 군주로서의 황제는 가족이라는 사사로운 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선 왕조들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부득이하게 형제들을 내친 옹정제를 봤을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독재 군주로서 그는 항상 만인의 위에 당당하게 서야만 했으나 그의 유약한 성격이 이런 점에 있어서 어느정도 약점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고, 옹정제는 스스로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nbsp하지만 그런 부분이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는 그 성격으로 인해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얻었으며 청 왕조의 정치체제를 공고히 다져놓았다. 이 말은 곧 그가 청 왕조 제 2의 건국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는 뜻이 될 것이다. nbsp사실 만주족은 그 수가 수백만에 불과한 군대식 사회조직을 갖춘 기병이 중심인 군단을 운용하던 동북방의 소수민족에 불과했다. 그 이전에 있었던 몇몇 정복 왕조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비슷한 실례로 만주족과 비슷한 배경의 몽골족은 유라시아를 정복하였고 거대한 대륙을 본국인 대원 울루스와 4한국으로 분할하여 다스렸지만 그 치세는 채 100년을 제대로 넘기지 못 했다. 하지만 청 왕조는 오늘날 중국의 계승선상에 존재했던 마지막 왕조로서 당시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라고도 일컬어지던 나라였었다. 원 왕조보다 그 영토는 적을지 몰라도 중국사에 끼친 영향은 그보다 더 했을 것이다. 왜 이렇게 극단적인 차이가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청 왕조의 경우는 옹정제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nbsp청 왕조는 중국사의 여러 왕조들 가운데 평균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으며 또한 단 한명의 무식한 군주가 등장하지 않았고, 독살이나 내분으로 비명횡사에 간 군주는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청 왕조가 멸망한 이유는 원 왕조가 그러했듯이, 한족의 반란때문이 아니라 서양 세력의 침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대목인데 당시 청 왕조의 지배를 받던 모든 백성들은 청 왕조를 정통성이 있는 명 왕조의 계승국가로 여겼다는 뜻이 된다. nbsp그리고 그렇게 된 이면에는 옹정제의 치세가 아주 중요한 작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기실 강희제 치세에만 해도 청 왕조는 거대한 영토에 걸맞는 제국적 시스템이 갖춰지지 못 했었다. 역사에는 가정이란 것이 없지만 그런 상황에서 옹정제가 아닌 다른 정복형 군주가 즉위했다면? 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분명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다음에 즉위할 건륭제가 이룬 업적을 본다면 역시 그에 앞선 옹정제의 치세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nbsp즉, 평자가 보기에는 옹정제의 이런 성격에서 기인한 그만의 정치 스타일이 청 왕조를 든든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nbspnbspnbspnbsp3. 뚜렷한 통치 철학과 뛰어난 정치감각 nbsp옹정제에 대해 논할 때 이 부분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중국사에서 가장 강대했던 왕조야말로 바로 청 왕조라고 생각하는데 그 강성함 이면에는 역시 옹정제가 잘 닦아놓은 정치 체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nbsp옹정제는 중앙 관제상 종래의 내각은 형식을 중히 여겨 정무가 막펴 잘 처리되지 못하는 단점을 안고 있음을 알고 별도로 황제 측근의 군기처대신(軍機處大臣)을 두고, 군기처가 내각을 대신하여 6부를 지배하게 하였다. 이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것으로 중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정치제도라고 생각한다. 또한 옹정제가 이런 정치적인 개혁을 한 이면에는 전통적인 농경민족인 한족(漢族)이 아니라 탄력적인 사고를 지닌 반농반목의 만주족(滿洲族)이었다는 점도 작용했다고 본다. 자고로 무슨 일에 있어서나 경직된 사고가 아닌 탄력적인 사고를 지닌 자야말로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nbsp또한 그는 지방의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도 크게 신경을 써서, 지방대관에서 주접(奏摺)이라는 친전장(親展狀)에 의해 정치 실정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황제 스스로 뜯어 보고 주필(朱筆)로 주비(朱批비평)를 써서 발신인에게 반송하여 지시, 훈계를 내렸는데 이것들 중 일부를 모아 편찬하고 또 이 책의 주요 사료로 채택된 것이 바로 앞서 여러번 언급했던「옹정주비유지(雍正朱批諭旨)」다. nbsp이것 역시 앞선 왕조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었는데 아마 저자도 옹정제를 논할 때 이 부분을 가장 높게 평가하지 않았을까 싶다. 옹정제는 즉위했을 때부터 청 왕조가 들어서기 전부터 대륙에 만연했던 전통적이고 비효율적인 국가 체제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그것을 자신이 바로 잡으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행한 정치적인 개혁은 하나같이 대단히 훌륭하고 대단히 효과적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nbsp특히 지방대관들과 나눈 주접이라는 서신은 옹정제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잘 알려주는 것이다. 청 왕조는 몽골족의 원 왕조와 달리 대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려고 하였가. 그 결과, 철저한 계급주의와 원리주의, 무력 통치를 실행했던 원 왕조와 달리 지배자가 직접 백성을 사랑하고 위할 줄 아는 너그러움과 아량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결국 청 왕조의 치세하의 백성들은 모두 천자의 덕을 칭송하고 자신이 청이라고 하는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옹정제 치세하의 독재 정치는 백성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 청 왕조는 수백년의 시간을 더 유지할 수 있었음도 잊지 말아야만 할 것이다. nbsp이처럼 여러 통로를 통해 얻은 정보들은 황제에게 접수되어 하나같이 주옥같은 정책 실행에 밑거름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청 왕조는 그 기반을 공고히 하였으니 옹정제가 행한 정책들이야말로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할 부분일 것이다. nbsp또 주목할 것이 당시 지방관리의 봉급이 지나치게 적었으므로 그들에게 양렴전(養廉錢)을 지급한 것인데 말 그대로 청렴 결백함을 기르는 돈이라는 뜻이며 이는 오늘날 보아도 대단히 합리적이고 뛰어난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과는 다른 일인독재체제하의 봉건국가에서 관리라는 것은 명분과 실익을 동시에 가져다 주는 돈방석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탐관오리로 인해서 수탈받는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옹정제는 당시 어느 정도 묵인되었던 관리들의 생존을 위한 수탈을(물론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법적으로 규제하고 대신 충분히 살만한 생계비를 지급하는 쪽을 택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의 신망을 얻은 것은 물론이요, 관리들과 중앙 정부간에도 이득이 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nbsp그 밖에 지방의 천민들을 헤아려 양민으로 만들기도 했으나 이것은 그가 행한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될 듯 싶다. 그는 청 왕조를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에서 더 나아가 백성들이 잘 사난 왕조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 같다. nbsp이렇게 간단한 몇가지 사례만 살펴봐도 잘 알 수 있듯이 옹정제는 정치력에 있어서 대단히 탄력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 이는 그가 그만큼 뚜렷한 통치 철학을 갖고 있었고 그에 따른 뛰어난 정치감각을 갖고 있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단순히 학습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이런 것들이 갖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옹정제 당시 총독 삼인방으로 불리던 톈원징, 리웨이, 오르타이 등은 모두 앞에 봤던 옹정제의 정책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사람들인데 옹정제같은 군주 밑에서 그와 같은 정책을 무리없이 수행한 것을 보면 이들의 능력 또한 대단했던 것 같다. nbsp이처럼 옹정제가 갖고 있던 정치적 능력은 저자가 책에서 표현한 이상이라고 평자는 본다. 명군(名君)과 명신(名臣)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봤을 때 신하들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에 걸맞는 임무를 주어 수행케해 결과물을 얻어내는 것이야말로 옹정제가 보여준, 모든 군주들이 가져야할 정치적 능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nbspnbspnbspnbsp4. 유순한 성격과 다른 무서운 결단력 nbsp아무리 옹정제의 성격이 유순하고 부드럽다고는 하나 그런 성인적인 면모 못지 않게 군주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결단력과 위엄, 소위 카리스마일 것이다. 그렇게 봤을 때 옹정제는 단지 성격 탓에 아버지 강희제, 아들 건륭제와 달랐을 뿐이지 그가 위엄이나 결단력이 없던 인물, 즉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다고 판단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한다. nbsp왜냐하면 그는 수누 일족과 관련된 기독교 문제도 슬기롭고 위엄있게 잘 해결했으며 그 다음으로 윈난, 구이저우, 광시의 산간에 사는 토착민인 먀오족이 토사(土司토착 호족) 밑에서 반독립적인 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개혁했다. 즉, 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인 유관(流官)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는, 개토귀류(開土歸流)의 정책을 펴서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영토를 확실하게 내지화(內地化)했던 것이다. nbsp당시 티벳이나 먀오족, 통족 등은 중원 밖의 영역이라 하여 간접적인 통치만을 했었는데 명대부터 그들에게 직접적인 통치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옹정제 치세때에 이르러 대륙 남부에 널리 거주하는 먀오족을 본격적으로 직접 다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 정책에 대해 반란의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워낙 철저하게 시행된 정책에 그들은 속소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듯이 옹정제는 어떤 일에 있어서 한번 결심한 바는 곧바로 실행하였으며, 성급하게 실행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준비해서 한번에 밀어붙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nbsp이는 저자가 언급하듯이 그가 신하들에게 황제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호령하는 것을 떠나서 그야말로 진정한 군왕의 면모를 훌륭히 갖춘 지도자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평자는 앞서 옹정제의 대외 정책에 대해서 강희제, 건륭제와 달리 소극적이고 크게 내세울만한 업적이 없었다고 한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개념이지, 결코 무시할 수가 없으니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개토귀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nbsp또 하나는 대외적으로 티벳의 동란을 평정, 지배체제를 확립하면서 서북 지방에서 강성하던 준가르부를 공격해 격파한 일이다. 옹정제의 치세 중후반에 행해진 이 대외 정벌은 그동안 청 왕조를 다스려온 옹정제의 의지이자 당당함의 표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오정제는 그 치세가 13년으로 아버지인 강희제(61년), 아들인 건륭제(63년)에 비해 극히 짧았지만 중국사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리고 그가 늦은 나이에 즉위했던 점을 상기한다면 그렇게 짧은 치세라고도 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nbsp대신 그는 아버지와 아들이 하지 못한 일들을 해냈다. 바로 청 왕조를 내부적으로 다듬고 고쳐서 기본 틀을 만들어냈으니 그것이야말로 옹정제가 칭송받아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Ⅲ. 맺음말 nbsp중국사상 가장 강대했던 왕조이자 동시대 전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하고 강대했던 왕조, 그 왕조의 기틀을 다진 옹정제를 보는 저자의 시각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이어서 왜 지금까지 이런 시각의 책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이런 인물에 대해 간과하고 있던 평자 본인에 대한 부끄러움도 들었다. nbsp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옹정제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을 뒤엎을 정도로 참신했다고 생각한다. 거기다가 그가 마지막에 강조했던 옹정제 독재정치의 한계에서 인간 옹정제를 뒤돌아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천하의 모든 일을 본인이 직접 관장하고 주재하느라고 개인의 영달과 황제로서의 부귀영화는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 한 사람, 거기다가 독재군주로서 포기하기를 강요받아야만 했던 사생활을 통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은 옹정제를 인간으로서 바라볼 수 있었다. nbsp또한 그가 죽으면서 그가 13년간 이뤄놓은 통치체제가 옹정제 치세만큼이나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던 점 또한 주목할만 하다. 왜 옹정제는 하루에 2030통, 많을 때는 5060통의 주접을 읽어야만 했을까? 세상만사를 혼자 다 처리할 수는 없을뿐더러 그 자리가 황제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정제가 그렇게 했던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가 다른 사람들을 믿지 못 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떤 일을 맡겨도 마음에 들지 않을 바에야 자신이 직접 하자는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자는 앞에서 총독 삼인방으로 불리던 옹정제 치세의 관리들이야말로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nbsp아니나다를까, 그가 청 왕조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독재자가 죽은 이후 그만의 독재정치는 다시 재현되지 못 했다. 철저히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었던 것이 아니라 특출난 개인적 능력에 의해 유지되던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비록 그 형태는 남았어도 다시 그처럼 철저하게 운영되지는 못 했던 것이다. 즉, 빛 좋은 개살구 격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래서 더더욱 옹정제라는 인물이 대단하게 평가받아 마땅한 것이고, 그의 치세가 청 왕조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올바른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nbsp굳이 한국사에서 비교해 본다면 아버지 고국원왕때의 엄청난 국난을 이겨내고 왕위에 올라 조카인 광개토태왕이 대제국을 이룩할 수 있게끔 토대를 마련한 소수림왕과 옹정제를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역시 고국원왕때의 끔찍한 국난이나 광개토태왕 시절의 위대한 대외정복 사업에 대해서는 언급하면서도 그 사이 즉위했던 소수림왕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것이 사실이다. 과연 소수림왕이 없었던들, 우리가 오늘날 아는 자랑스런 고구려사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이만 글을 마치려고 한다. 2006-09-13 17:14:32.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