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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정보

  • ISBN : 9791197280016
  • 출판사 : 코폴커뮤니케이션
  • 출판일 : 20221010
  • 저자 : 박상영

요약

이타카로 가는 셋넷 열차 ..함지훈(셋넷 수호천사, 평론가) 여행은 오래 지속될수록 좋다 해외여행을 가보거나 혹은 국내로 여행을 오는 젊은이들을 보면 흑인이 드물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렇다. 왜 그럴까? 두려움 때문에 그렇다고 진단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군인으로서 혹은 출장으로 낯선 곳에 갈 수는 있지만, 나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자유롭게 낯선 땅으로 가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배낭하나 짊어지고 낯선 곳으로 찾아온 백인 젊은이들을 보면서 부럽다고 말했다면 무엇이 부러웠다는 말이었을까? 젊음이 부러울 수도 있겠지만, 모든 젊음이 낯선 곳으로의 모험과 탐험에 나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두려움이 없는 자신감이거나 혹은 두려움을 이겨낸 마음이거나.떠나는 모든 것이 여행은 아니다. 하지만 내몰린 행군에서조차 그 길 위에 끝까지 남아 어떤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길의 끝에서 그 노정은 여행과 같은 모습을 띤다. 여기 먼 노정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젊은이들이 있다. 책에서 소개된 셋넷들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셋넷들을 북에서 온 이주 젊은이들이라 부르고 싶다. 이 책은 이 이주 젊은이들의 여행기다. 하지만 그들만의 여행은 아니다. ‘길잡이 늑대’가 함께 한 여행이다. 인디언들은 누구나 자신들 일생을 인도하는 ‘길잡이 늑대’가 있다고 한다. (책의 저자가 영화 편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 길잡이 늑대들이, 이 젊은이들이 남한 사회에서 선택한 셋넷학교라는 곳의 선생들이고 저자가 그 학교의 방향을 이끈 대표 길잡이 늑대다.거의 대부분의 탈북학교는 교회를 배경으로 특히 개신교를 배경으로 출발했다. 공산주의를 부정하는 교회는 북에서 온 이주 젊은이들을 품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들은 두 가지 점에서 불온했다. 북에서 왔다는 것과 요즘 젊은 것들이라는 점. 북에서 온 그들을 위해 이들 탈북학교들은 수령의 기표에 장군님 대신 하느님을 연결시켜 공산주의라는 삿된 이교의 무리들을 주님의 자손으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요즘 것들’에 대해서 학교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도야로 대응했다. 머리 숙여 순종하는 양들에게는 몸의 양식과 마음의 양식이 은총으로 내려졌다.셋넷학교가 그 밖의 탈북학교와 달랐던 점은 그 스스로가 교회에서 쫓겨난 자라는 것이다. 오직 영성만이 있고 집도 절도 없었던 저자도 교회의 사랑에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신자가 아닌 학생으로만 보려했던 저자는 교회서 쫓겨난다. 스피노자가 유대공동체에서 쫓겨난 것과 유사한 사건이다. 셋넷은 불온한 학교였다.셋넷학교는 추방된 학교였다. 공동체로부터 쫓겨나 밖으로 내몰린, 북한으로부터 또 교회로부터 길 위로 내몰린. 길 위에서 상처받은 자 길 위에서 나으리라. 셋넷은 길을 교과서로 삼았다. 셋넷학교의 꽃은 여행이다. 사실 여행은 그 자체로 학교다. 길잡이 늑대는 여행을 봉사활동과 묶었다. 다른 탈북학교였으면 봉사를 받기만 할 아이들이 ‘감히’ 봉사를 해야 하는 버거운 짐을 지고 여행을 떠났다. 학교를 세상과 다른 수도원으로 만드는 대신에 세상과 닮은 시장으로 만들기 위하여 남한 청년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이 책은 편파적 ‘늑대’의 시선으로 여행을 바라본다. 동시에 그 자신을 바라본다. 이 늑대는 여행을 통해 경건해진다. 자기가 버린 사람들, 자기가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아빠가 미안하구나. 니들에게 잘못한 게 너무 많다. 용서를 빈다. 제 욕심에 갇혀 몸부림치던 한 남자와 여자를 불쌍히 여겨 용서해주길 바란다.) TV 카메라 앞이 아니라면 고백하는 자들은 경건하다. 하지만 늑대가 경건해졌다고 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의 고백이 주인의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전략이라면, 늑대는 고백은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는 않는다. 잘 알겠지만 늑대의 길은 험난하다. 이 여행은 스스로 내세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그 교육적 의미를 오히려 상실한다. 저자는 먼 이국땅에서 만나야 할 셋넷의 졸업생들을 끝내 만나지 못한다. (미선이와 경민이를 만나지 못한 꼰대 나그네는 아쉬움으로 자꾸만 뒤돌아보는데, 오슬로역을 떠나는 기차는 망설임이 없다.) 남북의 젊은이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목표는 ‘하나투어’ 같은 패키지여행의 회사명일 뿐이다. 남북의 차이와 다름으로 결국 여행은 둘로 쪼개지고 만다. (우린 하나로 떠났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각자였다. 손말라 마을 봉사활동 작업에서 생긴 충돌과 상처들로 뿔뿔이 흩어진 채 남인도를 떠다녔다.) 여행의 길 위에서 남북의 젊은이들이 하나가 되었다면, 장군님 영도의 덕분이거나, 아니면 주님의 은총이었으리라. 그랬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멜로드라마거나 종교적 멜로다. 셋넷의 여행은 좌절과 패배의 계기들을 잔뜩 품고 나선 행군이다. 이 여행은 주인 품에 안겨 세상을 구경하는 패키지여행이 아니고 스스로 먹이를 구하러 다녀야 하는 늑대의 길이다. 길잡이만 늑대가 아니다. 아버지(상징적인 의미)의 집에서 도망친 셋넷들은 이미 늑대다. 셋넷들 모두 늑대다.셋넷은 아이들을 ‘훌륭하고’(개는 훌륭하다) ‘달라진’ (우리 개가 달라졌어요)’ 개로 키우고자 하지 않았다. 저들을 여전히 늑대로 남기고 싶어했다. 장군님이라는 큰 기표에서 도망친 아이들을 주님이라는 또 다른 큰 기표로 밀어 넣지 않고, 스스로 길을 찾도록 아이들을 길로 내몰았다. 길을 찾는 모든 행위는 구도의 길이다. 교회로부터 내쳐진 그(저자)가 구도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을 놓지 않는다. 신에 대한 믿음은 필요 없다. 피조물에 대한 믿음만으로 충분하다. 그 믿음 속에서 그(저자)는 때로 좌절하지만 주저앉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에도 카뮈의 ‘끝없는 패배’로 기뻐한다. 삶은 이기는 게 아니라 패배다. 끝없는 패배다.’ 그는 와이파이 신에게 사로잡힌 남한 대학생들로부터 도망치려하고, ‘3주 동안 핸드폰을 쓰지 않고’,(기특해라), ‘아픔과 상처를 기억하고 살아가는 베트남의 아들과 딸들에게 인간의 얼굴로 참회한다’.이 여행의 목적지는 어딜까? 일본의 유명한 시인 바쇼가 최소한의 물건을 지닌 채 방랑을 통해 시를 쓰고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그도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여정이 최종목적지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 여행을 마치는 책의 끝부분에는 카바피의 시 ‘이타카’가 이런 말을 들려준다. 여행은 오래 지속될수록 좋다고, 길 위에서 그대는 이미 풍요로워졌다고.책에서 미처 소개되지 못한 카바피의 시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제 이타카는 너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구나. / 설령 그 땅이 불모지라 해도 이타카는 / 너를 속인 적이 없고, 길 위에서 너는 현자가 되었으니 / 마침내 이타카의 가르침을 이해하리라.’ ‘이타카’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오디세우스의 고향이다. 모든 돌아가고 싶어 하는 자의 목적지다. 모든 여행의 목적지와 같은 의미다. 한국이 셋넷들의 이타카였다. 하지만 한국이 셋넷들에게 줄 것이 있었을까? 책의 앞부분에는 저자가 탈남(탈북이 아니라)한 셋넷학교 학생들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북을 떠난 탈북이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탈남은 남한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다. 오슬로에서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들이 탈남 학생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이타카였던 서울이 자신들에게 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또 다시 두려움을 떨치고 길로 나섰다. 그것은 셋넷학교가 서울을 버리고 다시 원주로 간 이주의 역사와 같은 성격의 사건이다. 셋넷과 탈남은 다르지 않다.그렇다. 떠난 자들이 나의 얼굴을 하고 있다. 여행은 어떤 의미에서 나의 얼굴을 찾는 일이다. 나의 얼굴을 어떻게 찾을까? 저자는 쉬운 말로 답을 준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세상 눈치 보지 않는 내가 참된 나다. 나는 나다.’ 세상 눈치를 보면 큰 기표가 나를 대신하여 삶이라는 큰 구멍을 채운다. 큰 기표란 장군님이거나 주님이다. 혹은 서울의 다른 이름인 ‘돈’이다. 또는 ‘와이파이’다. 게다가 큰 기표조차 지속가능한 것은 아니다. 평양이라는 기표는 한때는 동방의 예루살렘이었다가, 곧 동방의 모스크바로 바뀌었다. 하지만 나의 얼굴을 찾으려면 떠나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 이 책은 두려움을 떨치고 다시 길로 나선 여행 공동체에 바친 경건한 기억이다.

● “넌 여기서 뭘 하니? 여름이 지나가길 기다려.”(영화 〈콜미 바이 유어 네임〉) 누군가 넌 지금 여기에서 대체 뭘 하고 있지? 묻는다면, 나는 고도를 기다린다고 답하리라. 고도가 뭐냐고? 그래서 이 책을 썼다. 나의 고도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소통하는 관계의 삶이다. 이러한 소통과 인정이 가능하려면 감수성이 필요하다. 감수성이 뭐냐고? 공감하려는 의지와 태도이자 결단이고 실천이다. 혼자 있으면 심심하고 외롭고 쓸쓸하고, 같이 있으면 불편하고 조금만 방심하면 후회하게 된다. 공감共感은 강함에 끌리는 느낌이 아니다. 초인을 동경하려는 욕심이 아니다. 현실은 자연스럽고 자랑스러운 자신만의 존재감을 팽개치고, 힘과 기교와 표준과 강함을 욕망하도록 강요한다. 그래서 감수성을 연습하고 훈련해야 한다. 감수성은 온갖 일방적인 권위에서 벗어나, 세상의 모든 초월적 힘들의 유혹에 맞서는 원초적인 힘이다.

여행은 어떤 의미에서 나의 얼굴을 찾는 일이다. 나의 얼굴을 어떻게 찾을까? 저자는 쉬운 말로 답을 준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세상 눈치 보지 않는 내가 참된 나다. 나는 나다.’ 세상 눈치를 보면 큰 기표가 나를 대신하여 삶이라는 큰 구멍을 채운다. 큰 기표란 장군님이거나 주님이다. 혹은 서울의 다른 이름인 ‘돈’이다. 또는 ‘와이파이’다. 나의 얼굴을 찾으려면 떠나야 한다. 이 책은 두려움을 떨치고 다시 길로 나선 여행 공동체에 바친 경건한 기억이다.. 지훈향이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어떻게 키우고 싶냐고. ‘싸가지 있게 자랐으면 좋겠어요.’ 싸가지, 자기다움,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소통, 그게 바로 감수성이다. 나와 내 안의 나, 나와 가족, 나와 타인, 나와 이방인, 나와 세상 사이에서 매일매일 맺어야 하는 관계들을 싸가지 있는 소통으로 가꾸는 일상이 감수성 연습이고 감수성 훈련이다. 나와 당신이 품는 싸가지(감수성)의 격이 한 번뿐인 삶을 행복의 나라로 이끈다..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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