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 ISBN : 9788934992790
- 출판사 : 김영사
- 출판일 : 20201014
- 저자 : 김사철 외
요약
깨달음에 이르는 21세기의 로드맵명상으로 증명하고 실천으로 완성하는 반야반야바라밀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아제아제 바라아제…. 너무나 친숙한 《반야심경》의 문구이지만, 아무리 읽고 외워도 그 진정한 의미가 명확히 와닿지는 않는다. 정말 그저 독송하고 외우기만 하면, 고통을 소멸하고 행복에 이르는 완전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인공지능 컴퓨터 과학자와 사업가 출신인 두 명의 재야 불교연구자가 《반야심경》 공부법에 대하여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다. 대다수 해설서와 달리, 형이상학적이거나 추상적인 설명을 배제하고 초기 불전에 근거하여 붓다의 명상 과정에 맞추어 실증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난해한 개념들을 재미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저자는 “모든 사람은 깨어날 수 있다. 자갈치 시장에서 장사를 하든 바다에서 고기를 잡든, 깨어나는 데 직업이나 신분 따위는 아무 관계가 없다. 누구나 마음먹고 정확한 이론대로 실천하면, 깨어남의 궁극적 목적인 고통의 소멸, 즉 열반의 완성은 가능하다. 이것은 이미 2,600여 년 전 인류의 위대한 스승 고타마가 제시해준 그 깨달음의 열쇠와 다르지 않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이제 누구든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안내하는 붓다의 고귀한 여덟 겹의 길[팔정도]을 따라 《반야심경》 공부의 첫발을 내딛어보자. 팔정도의 완성이 지혜의 완성이다기존의 《반야심경》 해설서가 대개 공(空) 반야바라밀다 등 심오한 개념들에 대한 관념적인 설명에 치우쳐, 불교를 매우 난해하고 비밀스러운 영역으로 소외시킨 면이 다소 있었던 데 비해, 이 책은 《반야심경》의 주제가 다름 아닌 팔정도의 완성을 통한 지혜의 완성이라고 단언하며, 붓다의 심오한 가르침을 팔정도라고 하는 실천의 영역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팔정도는 (1)바르게 보다[正見] (2)바르게 생각하다[正思] (3)바르게 말하다[正語] (4)바르게 행동하다[正業] (5)바르게 노동(생계)하다[正命] (6)바르게 노력하다[正精進] (7)바르게 마음챙기다[正念] (8)바르게 집중하다[正定]의 여덟 가지 바른 실천 항목이다. 이 여덟 항목을 세 묶음으로 나누면 계(正語, 正業, 正命)·정(正精進, 正念, 正定)·혜(正見, 正思)의 삼학(三學)이 된다. … 계(戒, 실라sila)는 오관(五官)의 단속과 윤리적·도덕적 삶을 뜻하고, 정(定, 사마디sam?dhi, 명상)은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고요하게 모으는 삼매 수행을 뜻하며, 혜(慧, 프라즈냐praj??, 반야, 지혜)는 통찰지의 개발, 즉 사성제의 통찰을 뜻한다. … 지혜는 혜(프라즈냐) → 계(실라) → 정(사마디) → 혜의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고도로 개발되어간다. 이것이 반야바라밀다(프라즈냐 파라미타, 지혜의 완성)이다.p.60
● 대승 불교의 정수 《반야심경》, 초기 경전의 교학ㆍ수행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예로부터 유독 《반야심경》 해설서가 많이 출간되고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이러한 현상은, 오히려 우리가 《반야심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 이처럼 많은 해석이 필요한 것일까? 접근 방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인공지능 분야의 세계적인 과학자 김사철 박사와 불교연구가 황경환 선생은, 《반야심경》이 어려워진 이유를 한문 자체의 생소함과 한역의 부정확성, 그리고 붓다의 실증적인 가르침을 벗어난 형이상학적인 설명방식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 책은 산스크리트 원문을 우리말로 알기 쉽게 풀어내며, 초기불교의 교학 이론과 수행법을 기반으로 하여 《반야심경》을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한다. 대승 경전인 《반야심경》의 주제는 초기 경전의 내용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참신한 시각에서, 붓다의 근본 가르침과 명상 수행법을 전하는 초기 경전의 다양한 경문을 통해 《반야심경》의 핵심을 상세히 설명한다. 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법을 정확히 알고 바르게 실천하면 누구나 반야바라밀다, 즉 지혜의 완성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며, 그 길은 바른 생활, 바른 명상, 바른 통찰이라는 고귀한 여덟 겹의 길, 즉 팔정도임을 명확하게 밝힌다.
고타마 붓다의 종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다.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고타마 붓다의 명상이 필수 불가결하다. 고타마 붓다의 제자, 즉 불자佛子라고 하는 말은 고타마 붓다의 명상을 하는 사람과 동의어이다. 아무리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고 부처님을 믿고 또 어떠한 불사를 하고 신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고타마 붓다가 가르친 명상 이론을 모르고 명상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적어도 고타마 붓다의 진실한 제자와는 거리가 멀다.p.97바닷가의 벼랑 밑에서 일고 있는 파도를 보라. 그곳에 어디 안정되고 불변하는 파도가 있는가? 연속적으로 변해가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파도는 없고 오로지 파도침만 있다. 정지된 개념으로서의 명사는 없고 계속 변해가는 동사만 있다. 그러므로 파도치는 현상은 비어 있음의 현상이다. 이 비어 있음의 세계에서는 이것 저것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다. 이것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것은 변해 버리고 다만 이것의 인식만 있을 뿐이다.p.130고통받는 민중에게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반야심경》이라면, 그것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들의 언어로 쓰여야 한다. 따라서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식의 전달은 고타마의 정신에 맞지 않는다. 우리도 고통받는 배달 민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배달말로 고타마의 다르마를 전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p.21시공간이라는 세계에서 모든 개념은 이원성(duality)에 의존한다. 예컨대 왼발이라는 개념은 오른발이라는 개념 없이는 홀로 설 수 없다. 이를 이원성이라고 한다. 나아가 선善이라든가 믿음이라든가 하는 개념들도 홀로 서는 개념이 아니라 선-악 믿음-의심 등의 방식으로 이원성에 근거해 있다. 믿음이 이원성에 근거한 개념이라는 것을 모르고 믿음을 강조하면 할수록 의심 또한 동등하게 강조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의심을 없애려면 믿음을 강조하지 말고 오히려 믿음을 없애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면 믿음의 쌍둥이인 의심도 같이 없어진다.p.180 지금 우리가 주로 독송하고 있는 《반야심경》은 중국의 현장 스님이 서기 649년에 한문으로 번역한 것으로, 내용이 첨가되거나 앞뒤가 뒤바뀌거나 중요한 내용이 결락된 부분이 있어, 산스크리트 원전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고대로부터 이 경에 대한 많은 연구와 해석, 주석이 있었지만 듣는 이에게 그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시키지 못하여 아쉬움이 있었다. 한국불교 1600년의 장구한 시간 동안, 지나치게 중국 불교를 답습해온 것이 아닌지, 그 때문에 우리는 위대한 스승 고타마 붓다의 정신과 가르침을 어긋나게 이해하고, 그래서 깨어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지나친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지 않았는지 되돌아볼 일이다.p.5무지의 의식 상태에서 다섯-스칸다(오온五蘊)는 나이고, 명지의 의식 상태에서 다섯-스칸다는 나가 아니다. 그렇게 해서 범부 중생과 깨달은 이의 차이가 명확해진다. 범부 중생은 다섯-스칸다가 있고 오취온(五取蘊)이 있지만, 깨달은 이에게는 다섯-스칸다는 있지만 오취온이 없다.p.82공을 표현하는 우리말은 비어 있음이다. 그러나 공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있을 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은 없다는 말이다. 이 절묘한 언어의 마술이 한글 속에 담겨 있다. 중국인들은 그 위대한 한문을 가졌으면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옹색한 표현을 한다. 그들은 참다운 공은 진실한 있음이다[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말한다. 이것은 공을 허무로 파악하는 일부 지식인들에 대한 경고이겠지만, 있느냐 없느냐의 이분법적 논리에 젖어온 지식인들로서는 또다시 알쏭달쏭해질 수밖에 없다.p.97과학이란 증명을 통해서 안다라는 뜻이다. 고타마는 명상적 증명을 통해서 아눗다라삼먁삼보디를 얻었다. 그는 누구든지, 어디에서든지, 언제든지, 똑같은 명상 방법을 사용하면 똑같은 경험을 할 것이라고 했다. 고타마가 알아낸 첫 번째 지식은 나의 초월성을 증명한다. 나는 시공간이 아니라 비시공간에 있다. 그러나 나의 삭까야는 시공간에 속해 있다. 나의 삭까야들은 생멸하지만 나는 불변이다. 나는 태어나지 않고 죽지 않는다. 두 번째 지식은 초월적 존재인 나가 시공간의 삭까야와 관계 짓는 카르마의 법칙이다. 세 번째 지식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 즉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통찰하고 깨닫는 방법이다.p.199불교는 내가 변하는 공부이다. 삼독三毒에 찌들어 있는 나로부터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라는 사무량심의 정자亭子를 건립해 나가는, 나로 변해가는 공부다. 탐ㆍ진ㆍ치의 삼독에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중독의 상태에 내가 처해 있는데, 부처님 말씀이라고, 또는 조사님의 말씀이라고 들은 천언만설千言萬說이 나를 이 중독으로부터 해독시키는 양약이 되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p.261
#반야심경 역해
리뷰
i*** 한자로 이해하는 것이 더쉽다 2020-12-19 09:13:55.9
j*** 반야심경을 해석함에 있어 구차제정이라는 수행의 차제를 도입하여 설명하고 있는 독특한 책이다. 다만 136쪽의 박스 안의 내용은 편집상의 오류인듯 하다. 한문경전상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이하가 와야할 곳인듯 한데,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하가 써져있다. 2022-03-15 21:56:57.64
p*** 나는 의미만 좋게 담겨 있다면, 비록 그 뜻을 몰라도 수지하여 독송하기만 해도 큰 공덕을 갖는다고 알고 있었습니다만,.반야심경 역해를 읽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반야심경은 모두 피상적인 지식에 다름아니었던 것이죠.이책, 반야심경 역해는 반야심경에 숨겨진 참된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2021-06-27 14:19:07.15